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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개신교) 까기/변론

2017.10.06 14:21

녹황 조회 수:197

까기
변론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니, 굴종의 관념이니 비판하시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 자체가 저항과 의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에게 들려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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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은 어디까지나

가톨릭에 대해서만 의심하고

가톨릭에 대해서만 도전하고

가톨릭에 대해서만 항의하고

가톨릭에 대해서만 반항했다.


그럼 의심의 대상, '가톨릭'은 대체 무엇인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전야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의 위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로마 가톨릭은 당대의 세계관이다. 세계관 즉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식 즉 '앎'으로서 세계가 구성된다.)

Reformation으로 번역되어 있는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에는

사상적, 세계관적 측면에서는 기실 Revolution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톨릭'에 대해 의심하고, 도전하고, 항의하고, 반항하였다는 것은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되겠는가?

'세계관'에 대해 의심하고, 도전하고, 항의하고, 반항했다는 의미로 치환되기 충분한 것이다.

그것이 '~만'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

가톨릭은 그 시대에 '~만'이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의 '그 따위'의 위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16세기 로마 카톨릭은 아직까지 세상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세계관 그 자체였다.

비록 14세기 아비뇽 유수, 교회 대분열을 겪었지만,

여전히 유럽은 로마 카톨릭의 정신적 세계관 그 자체에서 벗어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 프로테스탄티즘이 "유의미하게" 내적인 회의와 내적인 도전을 허용한 적은 없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를 지켜보면 17-18세기 정통주의, 18-19세기 경건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운동으로 진행된다.

개신교 신학자 중에서 정말 유의미한 내적 회의와 도전을 허용한 적이 없는가?

실존주의의 서막을 열어재낀 키에르케고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슐라이어마허, 리츨의 자유주의 신학,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탐구, 불트만의 비신화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지식인의 성자(聖者) 틸리히,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 상황신학에 이르기까지

대체 어떤 것이 내적인 회의와 도전을 허용하지 않은 것인가?

이들이 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새롭게 혁신되는 것이 개신교 전통의 신학흐름이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가 항의하고 반항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이 바이블에서 벗어난 행위를 한 것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바이블에서 벗어난 것을 바로잡기 위함이 첫 목적이었는데, 그럼 어떤 것을 하여야 했는가?

종교 개혁의 원초적인 목적은 크게 2가지로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회복이 가장 큰 논점이었고,

두 번째가 성서주의의 회복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이 문제될 것이 있는가?

법령을 지키지 않은 시대에 그 법령을 회복하는 것 자체로 목적을 국한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보다 유연했던 것은 사실상 일반 신자의 바이블 보유 허용여부 한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더욱 간편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그러나 순전히 억측일 뿐인 구원론으로써 바이블을 읽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오류를 담고 있는데,


첫 번째로 일반 신자가 바이블 보유가 불가능했느냐?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후들의 궁정에는 왜 성서가 있었겠는가?

읽지 못한 것도 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싼 탓도 있었다.

또한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서인데, 일반 신자로서 대부분 문맹인인 상태에서 그걸 뭐에 쓰겠는가?


두 번째로 가톨릭 전통 내에 성서에 대한 집중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종교개혁 직전에 시대에는 신심운동이 있었는데,

성유물(Relic)에 대한 집중과 성서에 대한 집중이 12-13세기 무렵 매우 강화되었다.

교회는 오히려 직접 성서를 읽는 것을 '권장'했다.

물론 식자층만이 이를 읽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라틴어로 되어있으므로)

그러나 어찌되었든 가톨릭 교회는 성직 외의 자가 성서로 접근하는 것 자체를 완전히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두 번째 문장인 '순전히 억측'이라던가, '바이블을 읽을 필요가 없게'라는 표현은 예정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성서지상주의'까지 이야기 되는 마당에서 바이블을 안 읽는다는 것이 무슨 궤변인가?

개신교도에게나 가톨릭교도에게나 바이블은 신의 말씀 즉 로고스(Logos)이다.

신과 '교류'하고, '교통'할 수 있는 훌륭한 창구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구원론 즉 (종교철학적으로는) '인간이 신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정론의 이해는 반드시 자유의지론과 결합해서 그 논쟁의 양상을 고려하면서 대조해가며 함께 읽어야 하는 것이지,

박제된 채로 뚝 떼어내서 보겠다고 하는 생각은 별로 좋지 않다.

예정론을 박제된 채로 뚝 떼어내서 읽어 냈기 때문에 루터도 당대의 개종한 독일 사람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들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반항과 도전이라는 덕목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선언지 긍정"이라는 것은 벌써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비웃음을 받았던 오류가 아닌가?


솔직히 어떤 명제로 선언지 긍정이라고 표현하였는지를 잘 모르겠다.

<프로테스탄티즘 → 반항과 도전>

이라는 명제로 썼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설명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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